[인생박물관] 박찬원 계룡시 왕대1리 노인회장 "평생 걸어온 사도(師道), 이젠 집과 동네에도~"

문화공감 | 기사입력 2020/12/10 [13:17]

[인생박물관] 박찬원 계룡시 왕대1리 노인회장 "평생 걸어온 사도(師道), 이젠 집과 동네에도~"

문화공감 | 입력 : 2020/12/10 [13:17]

[인생박물관] 박찬원 계룡시 왕대1리 노인회장

평생 걸어온 사도(師道), 이젠 집과 동네에도~


계룡시 두마면 왕대1리 노인회의 박찬원 회장은 계룡시 홍보모델이다. 인기탤런트인 이승기 씨와 함께 계룡군문화축제 포스터에 나온다. 큰 키와 군살 없는 몸매, 그리고 멋진 미소를 가진 계룡시 공식 멋쟁이 박찬원(朴贊元, 74세) 회장! 그를 늦은 가을 어느 날 왕대1리 회관에서 만나보았다.

 

 

교사의 일거수일투족이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

 

그는 계룡에서 멀지 않은 대전시 유성구 세동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대전시지만 그가 태어나던 당시는 충남 대덕군 진잠면 세동리였다. 선친께서 일제강점기 말기에 남양군도로 징용에 끌려가 활주로 닦는 일을 하다 해방 될 무렵 구사일생 돌아오셨는데, 그는 그 이후인 1946년에 1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6·25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봄 이곳 계룡으로 이사를 왔다.
1953년도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전후라서 그랬는지 서너 살 많은 동네 형 누나들과 한 학급에서 공부를 했다. 그러다 보니 학습력도 떨어지고 공부에 재미가 없었다. 운동회 때 달리기를 하면 꼴찌는 맡아놓은 당상이었다. 아무래도 서너 살 많은 형 누나들을 공부에서도 또 체력에서도 따라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계룡에는 중학교가 없었다. 그래서 진학을 하려면 대전으로 나가야만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학교에서는 진학할 학생들을 모아놓고 야간공부를 시켰다. 허나 이는 말뿐, 지도 선생님들은 “수련장 문제를 풀어라” 하고는 밖에 나가서는 얼큰하게 술 한 잔씩 하는 등 아이들의 학습지도에 통 열의가 없었다. 결과는 처참했다. 중학교 1차 시험에 단 한 명도 합격하지 못하고 지원자 36명 전원이 불합격하였다. 어린 나이임에도 “내가 만약 선생님이 되면 절대로 그러지 말아야지” 결심했다.
그는 지금은 우송중학교로 교명이 바뀐 대전동중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했다. 대전고에 갈 만한 성적이 되었고 또 희망하였으나 선생님이 극구 만류하며 대전상고 진학을 적극 추천하였다. 결국 대전상고로 진학하게 되었다. 같은 재단의 상급학교로 우수한 학생들을 진학시키려는 학교의 의도 때문이란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큰 신장과 좋은 체격을 가진 그는 배구부에 들어가 선수생활을 했다. 떠밀려 시작한 운동이었다. 운동을 하느라 남들은 모두 주산 1~3급 따는데 자신은 5급밖에 따지 못할 정도로 공부할 시간이 절대 부족했다.
3학년이 되자 진학반과 취업반으로 나누어 공부를 했는데, 취업반으로 들어간 그는 모든 것이 부족하기만 했다. 특히 영어가 취약했다. 영어실력을 높여보려 해외 펜팔도 해보았다. 답장으로 온 영어편지를 해독할 수가 없어서 영어선생님에게 가져가 해석 좀 부탁하자 선생님이 꿀밤을 먹이면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쓴 편지가 무슨 말인지 도통 말 수 없다”고 핀잔을 주었다. 충격을 받고 영어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통째로 외기로 결심했다. 뭐든지 하기로 결심하면 한눈팔지 않고 집중했다.

 

  

 

자원한 군입대, 교직으로 출발

 

그는 외아들이라서 군에 안 가도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육군에 자원입대하여 최전방인 강원도 철원 3사단에서 복무하였다. 아버지는 외아들인 그가 “ 군에 가서 잘못 되면 대가 끊기는 것이니 결혼을 하고 군대에 가라”고 해서 1967년도 결혼 후 바로 군에 입대했다.
그가 군에 입대하고 다음해인 1968년도에 너무나도 유명한 무장간첩 청와대 습격사건인 1.21사태가 발생하였다. 군생활이 갑자기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매일 완전군장을 하고 산악구보를 하는 강훈련을 했는데 체력이 월등했던 그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루는 면회를 온 아버지가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는 당장 의가사제대 신청을 했다. 그는 외아들이었고, 결혼한 상태였고, 어머니는 회갑이었고, 재산이 없는 집안이었기에 모든 것이 제대 조건에 맞았다. 그래서 6개월 후 의가사 제대를 하였다.
제대 후 대학 때 교수를 찾아뵈었는데, 교수님이 “공주대학교 교원양성소에 응시해보라”고 권하였다. 모두 50명을 뽑는 시험에 무려 1천 명이 몰린 어려운 시험이었다. 합격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그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합격했다. 그때가 1969년도였다.
그는 1970년 4월에 서산에 있는 원북초등학교로 첫 교직 발령을 받았고, 39년의 교직생활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1년 후인 1971년도에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는 서산에서 3년을 있은 후에 논산의 호암초등학교를 거쳐 개화초등학교, 그리고 두마초등학교를 번갈아 오가며 대부분의 교직생활을 집 근처에서 하게 되었다. 물론 중간중간에 홍성에도 갔었고 가야곡이나 벌곡에서도 근무를 했었지만, 홍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71년도에는 처음 개최되는 소년체전에 관내 아이들을 모아 배구 팀을 만들어 준비하였다. 그러나 지역에서의 인식부족으로 지원을 받지 못해 서산군 예선에 나가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논산에 와서는 과학을 지도하여 실험실습대회에 나가 당당히 1등을 하였다. 이 일로 그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두마초등학교에 올 수 있었다고 한다.

  

 

살아남은 자의 오늘과 내일

그는 아내 이희순(李熙順, 73세) 여사와의 사이에 4남을 두었다. 모두 가정을 이루었으며 장남은 공무원, 둘째는 대기업인 효성그룹에, 셋째는 자영업을 하고 있다. 모두 각자 처한 곳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며 잘살고 있다. 그러나 막내는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1년 후 며느리도 암으로 뒤를 따랐다.
“시간이 꽤 지났지만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그의 가슴은 아프다 못해 무너지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털어놓는다. 아들과 며느리 사이의 남겨진 손주 3남매를 현재 그와 아내와 함께 키우고 있다. 어느덧 자라서 지금 큰 애가 중학교에 다니고 있고, 아무 것도 모르던 철부지 막내가 벌써 초등학교 5학년이다.
그는 “평생 아이들을 지도하고 가르쳤지만 지금 손주들을 가르치고 키우는 것이 더 힘들다”고 말한다. 더구나 올해 코로나19 때문에 학교를 가지 않고 집에서 온라인으로 비대면수업을 하고 있는데,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라 “가정에서 어떻게 아이들에게 학습지도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소연이다.
아들 내외를 잃기 2년 전, 그와 아내가 큰 사고를 당했다. 모임에서 부부동반으로 중국 산동반도로 해외여행을 갔는데,  첫날 버스로 이동 중 큰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여행단 너나할 것 없이 모두 큰 중상들을 입었고 2명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대형사고였다.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완전 회복하고 현재는 왕대1리 노인회장 직을 맡고 있다. 두마초등학교 총동문회장도 맡고 있다. 계룡시 군문화축제 2016년도 홍보모델로 선정되어 그의 멋진 모습을 당시 포스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밖에도 지역을 위하여 솔선수범하는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그는 칠십대 중반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운동선수와 같은 단단하고 멋진 외모와 온화한 미소의 노신사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기념사진을 찍으며 ‘멋지다’고 필자가 반응하자 “교통사고 이후 어깨를 위로 올리기가 몹시 힘들어졌다”고  말한다. ‘팔이 아파 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 요즘 찾고 있다’ 말하면서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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